바람부는 날의 뉴욕, 커피와 한잔하는 작은 생각들
(A) 지하철 2호선 (2011년 3월에 씀)
나는 서울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것이 있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남의 도움도 필요없다.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보는 것이다. 왜 15시간을 비행기타고 가서 겨우 지하철 2호선 이냐고요 ?
한국 TV 에 "다큐멘타리 3일" 이란 프로가 있다. (지금도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72시간동안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얘기를 생활현장과 함께 화면에 담아 인기인들의 나레이터로 50분간 방영하는데 2009년 말쯤인가 "서울지하철 2호선"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세계에서 단일지하철 노선으로 하루 이용객이 가장 많다는 서울의 황금노선이자 순환노선, 새벽 5시가 되자마자 신도림역출구가 열리고 무가지 몇장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는 직장인들 얘기부터.
사당지하철역 의자에 앉아 이미 60대, 40대가 된 언니동생이 300원짜리 자판기커피를 뽑아 들고 "언니나 나나 지하철역 근처에 살기 때문에 딱 중간인 여기서 만나서 줄것 주고 얘기하면 참 좋다"며 동생이 담근 물김치를 언니에게 주며 지난얘기 꽃을 피우는 자매.
아들이 40이 넘었는데 지병으로 현대아산병원에 누워있다며 지하철칸을 돌며 신문지를 수거해 고물상에 팔아 아들약값에 보태겠다며 굽은 허리로 지하철내부를 돌아다니는 70대 노모.
"제가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어머니를 곁에서 자주 뵙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전화할때마다 하신 말씀을 하고 또 하고 해서. 그게 치매인지는 몰랐어요. 이제 회사에서 명퇴하고 시간이 많으니까 매일 어머님을 병문안하러 2 호선을 타고 갑니다" 검은 뿔테안경을 낀 57살의 아들이 90세 노모를 찾아가는 모습.
"아니 정말 어이가 없네. 정말 너무하네요. 내보따리 얼마나 한다고 그걸 훔쳐가다니" 남대문에서 아기내복을 도매로 떼와 사람들 많이 지나 다니는 종로3가역 매표창구 앞에서 단속을 피해 노점하던 아저씨 옷보따리를 화장실 다녀오던 사이에 누가 훔쳐갔다.
"살기 힘들다 힘들다 해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는 모양이네요" 카메라앞에서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한 50대 아저씨.
"그냥 가는 거예요. 안가면 찍히니까" 오늘 회식이 있다며 저녁 퇴근길에 직장동료 몇이서 2호선을 타고 뚝섬역까지 간다는 50대 중반의 남성들. "회사생활이야 힘들지만 힘들다고 얘기할수 있나요. 우리 나이에 붙어 있는거만 해도 다행이죠." 회사로고가 찍힌 짙은 권색잠바의 중소기업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자식들 눈치보기 싫어. 아침에 2시간만 일하면 용돈은 나와" 매일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강남역에 청소하러 간다는 60대 중반 할머니 "돈벌고 운동되고 얼마나 좋아" 그얘기가 맞다고 맞장구치는 청소하는 할머니들이 새벽지하철안에 가득하다.
"누가 얘기했죠. 인생은 고해라고. 정말 사는게 장난이 아니예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조그만 과외학원을 한다는 40대 후반의 아줌마 11:40분 막차를 타고 교대역에서 막내리며 핸드폰벨소리를 듣고 기자에게 얘기한다.
"우리딸이예요. 요시간만 되면 엄마 잘오고 있는지 꼭 전화해줘요. 이전화 받으면 하루피로가 싹 가셔요" "그래 엄마야 나 지금 지하철에서 내렸어. 10분내로 집에 들어갈것 같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그리고 지하철 2호선이 뚝섬, 한양대역 부근을 지날때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서울의 모습이 보이고 들국화 멤버였던 전인권의 노래 "돌고 돌고 돌고 돌고"가 흘러나온다.
세상은 정말 돌고 돈다.
오늘은 Citi Bank 와 Bank of America 주식 갖고 있는 사람은 쾌재를 부른날이었다. 아마 1년기준하여 최고로 많이 오른 날이었다. 몇년전부터 이주식을 사모은 친구놈은 오늘 술먹자고 연락왔다.
오전에 발표한 지난달 소매경기가 예상치를 넘어 좋았고 오후 2시에 버냉키 연준의장이 미국의 인플레걱정은 일시적이다라고 낙관했고 장막판 Chase 은행이 15 billion 자사주식을 사들이겠다는 발표가 있자 은행주는 급상승했다.
나도 소주를 한잔 먹어야겠지만 이유는 반대이다. 지난 5년간 침체를 면치 못했던 부동산펀드에 연초부터 돈을 옮겼는데 재미가 없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회복되리라는 부동산시장을 미리 낙관한 것이다. 옆집처녀가 결혼할 마음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혼자서 예식장부터 잡아놓은 격이다.
인생은 주식시장이나 지하철 2호선처럼 돌고 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움직이고 바빠지고 걷는사람 뛰는 사람 서로 다르게 같은 시간속에 다시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전인권의 노래중)
마치 절대군주가 된것처럼 폼을 잡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안양교도소로 향한다. 화려한 브라운관에서 애절한 여주인공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여인도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뉴스에 나온다.
한국 좋다고 미국서 돌아가는 사람 그래도 미국이 좋았다며 다시 돌아오는 사람 인생은 돌고 돌고 돌아 인천공항만 바쁘게 돌아간다.
그래 오늘은 홍대역에서 내려 마포 주물럭갈비에 소주 한잔, 내일은 사당역에 내려 버팔로 윙에 생맥주 한잔, 모래는 왕십리역에 내려 시장에서 파전부쳐 막걸리 한잔. 아 돈다 돌아. 술취해 돌고 2호선 타고 돌고 한국미국왔다갔다 돌고 주식 올랐다내렸다 돌고 내인생도 돌고 돈다.
나는 가끔 사람이 그립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 생각이나 관심사가 비슷하고 내가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는사람, 가까이 가면 내가 자주 먹던 음식냄새가 옷에서 나는 사람, 그 사람들과 가까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말없이 그냥 서있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마치 그들의 표정은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의 모습과도 같다. 맞다. 그들은 철학자들이다.
대학을 가기위해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몸으로 인생의 교훈을 터득한 나의 스승들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들과 함께 복잡한 강의실에서 몸을 부딪치며 같이 있다. 그 강의실의 이름은 지하철 2호선.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것,너무 좋아할 필요도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겸허한 배움의 현장이다.
(1)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곳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쓴 글이 있었는데 글의 주인공이였던 R 형님은 2013년 위암말기로 한국의 국립암센터에서 수술후 의식을 찾지 못하고 바로 세상을 뜨셨다.
그는 미국생활 25년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무리 짓던 중 위암판정을 받고 미국서는 수술이 힘들다고 하여 한국까지 간 것이다. 경남 통영으로 갈려다가 경기도 시흥으로 결정해 그곳에 다세대주택을 구입하였다.
아들만 둘이였는데 작은 아들이 권총강도로 3년형을 받고 미국형무소에 복역을 한 후 한국으로 추방되면서 한국행을 굳힌 듯 하였다. 젊은 시절 월남까지 가서 고생을 했지만 자식을 감옥에 보낸 후 괜히 미국에 왔다며 술로 세월을 보낸 휴유증이 병으로 온 것 같았다.
... 1949년생이던 R 형님은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낮에는 지붕고치는 업자들을 따라 다니며 귀국자금을 모았다. 어느날 지붕고치다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쳤고 쇠를 다리에 박아 걷는 것도 불편하셨던 분이였는데 예정된 귀향을 몇달 앞두고 결국 말기암환자가 되어 인천공항에 내리는 운명이 되었다.
안동권씨 몇대손이라고 항상 입에 달던 K 형님은 2007년 뉴저지 안쪽으로 이사를 가신후 나의 사무실에 들러서 소주한잔 하는 낙을 포기했다. 한국서 종합병원 간호사였던 형수는 네일가게를 그쪽에 열었고 아예 집까지 이사를 한 것이다.
아침에 문을 열어 주고 직원들이 퇴근한 후 빈가게 청소하는 일이 전부였던 K 형님은 이렇게 살 바에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전화도 가끔 하셨는데 2011년 가을 가족들이 없는 집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저녁에 가족들이 돌아와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C 형님 (53년생) 을 안 것은 15년 정도된다. 영주권을 신청하면서 사기를 당했고 그이후로는 포기하고 있던 중에 다행히 군대간 둘째아들이 시민권을 받아 작년말에 C 형님과 형수가 영주권신청을 재개하였다.
몇년만에 다시 만난 C 형님을 보는 순간 너무 놀랬다. 그전에 동네골프장에서 뵈었을땐 건강하였는데 몸이 반쪽이 되였다. 위암에 식도암까지 겹쳐 작년에 죽는 줄 알았다며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형님이 오늘 나에게 전화하였다. 더 이상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기가 힘들것 같다고 하면서 암이 재발하였는데 의사는 마지막까지 해보자고 하지만 아무래도 힘들것 같다고 하였다. 1994년에 미국 왔으니까 21년째 한번도 못 간 고국에 죽기전에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유난이 눈물이 없던 나에게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눈물은 그냥 한국서 계속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유럽이나 캐나다와 달리 미국은 불법체류자들이 참 많다. 어제밤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미국생활 다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아들...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오늘밤이라도 돌아가겠다는 딸...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거라는 것...아니 저세상으로 떠나는 부모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단 1-2주도 다녀 올수 없다는 것... 그들의 신분이 그리고 그들따라 미국에 온 어린 자식들을 다시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또 내가 없으면 하루도 돌아가지 않는 작은 가게가 그들의 족쇠이다.
인터넷 스마트폰이 흔하디 흔한 지금의 세상에 떠나온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있고 힘든 하루를 마감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를 보고 마음을 쓰러내리는 사람들이 내주위에 많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수 있는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지구의 저편 회색의 거리에 오래동안 남아 그들의 사연과 아픔을 가슴깊이 목격할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이 접근하지 못한 존재의 진실을 떠나온 자들의 눈물에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3천년전 유랑의 땅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사야선지자의 예지를 오늘에 되새기며 소외되고 잊혀진 나와 같은 백성들의 희망을 글로 남길 것이다. JEFF
(2) 아버지와 아들 (I)
이문장을 Daum 의 언어섹션에서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A long life may not be good enough, but a good life is long enough" (긴 인생은 충분히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 아주 쉬운 단어만 사용된 문장이라고 해서 이런식으로 직역을 하면 글을 쓴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이문장의 번역을 맡기면 이렇게 해석하겠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래사는 것보다 제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이문장을 쓴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 (1706-1790) 이다. 미국의 건국사에 빠질수 없는 애국자이자 선각자이다. 그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미국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기록될 만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국민에게는 그것만으로 좋은 것 (good) 이 될수는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아쉬움으로 남는 기억이 있었다.
그에겐 자신을 닮은 총명한 아들(William Franklin)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은 자식이였다. 아버지 벤자민은 아들 윌리암을 명문법대를 졸업시키고 정계에 진출시켰으나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영국의 식민지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는 보수세력을 규합하여 뉴저지의 주지사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아들은 영국편에 서서 미국의 독립전쟁을 저지하다가 영국군대가 자국으로 후퇴할때 같이 영국으로 떠났고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 후대의 사람들은 아들 윌리암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성장했을거라는 추측하고 있다. 윌리암은 아버지의 정식 자식이 아니고 사생아였다. 윌리암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인다고 그런 아들 윌리암도 역시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사생아 (Temple) 를 낳아서 기른다.
그리고 영국으로 도망간 아들 윌리암은 자신의 자식인 템플을 버리게 된다. 오랫동안 아들의 행적을 비밀리에 추적한 아버지 벤자민은 그의 손자인 템플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손자를 미국으로 데려와 뒷바라지를 한다.
벤자민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긴 인생을 살았지만 버려진 손자를 다시 데려와 키우기 전까지는 아들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을 없앨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생을 제대로 살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자신에게 있다. 세상이 주는 어떤 직함보다도 아버지라는 이름이 더 소중하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JEFF
(3) 결혼무효와 신뢰
법적인 용어로 결혼무효 (annulment)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혼 (divorce) 과는 다른 것이다. 이혼은 결혼상방이 결혼의 성립을 의심하지 않으나 그후의 이런저런 사유로 결혼의 사회적이고 법적인 고리를 스스로 끊는 것이다 (합의든 아니면 법원의 결정으로든) 결혼무효는 처음부터 결혼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쪽이 증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속아서 결혼하는 것은 여기에 포함된다. 총각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타주에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했었고 (그 결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가정) 혹은 동성연애도 합법인 지금의 미국에서는 레즈비안인줄 알았더니 레즈비안과 이성(남성)과의 성관계를 다 유지하는 파트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등... 혹은 결혼은 안했지만 숨겨놓은 자식이 있었다는 등.. 학자금융자를 다 갚았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는 등.... 참 사유도 많다.
미국은 참으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는 문화를 유지하기에 거기에 맞추어 그들의 사고나 행동을 규정하는 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실정법과 판례법을 같은 무게로 두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이나라에서는 법규정상으로는 분명히 같은 범법행위를 했어도 반드시 Hearing 이라는 절차를 거쳐 개별적인 상황에 맞게 규정이 적용될수 있는 기회를 피고에게 부여한다. (헌법상에 보장된 Due Process of Law 의 권리이다)
결혼을 하면 세금보고상에 Married Filing Jointly (부부가 같이 같은 세금양식으로 보고하는) 할수가 있는데 이것은 두사람이 싱글이였을때나 혹은 결혼 후에라도 각자보고 (Married Filing Separately) 는 것보다 세금의 혜택이 많다. (공제조항이나 세금크레딧도 더 많음) 그래서 결혼을 한 부부는 한배우자가 결혼이전에 세금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같이 보고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2012년 A 와 B 가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부부로 세금보고를 했는데 2014년 12월에 결혼무효결정을 법원에서 받았다. 그러면 두사람은 지난 결혼기간에 햇던 세금보고를 싱글의 자격으로 정정(amend) 하여 다시 보고해야하고 세금과 그동안의 이자도 물어야한다. (피해받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이런 비용도 상대방에게 청구할수 있겠지만 그런 민사소송과는 별개로 두사람에게 세금이 계속 따라 다니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한다. 결혼무효판정을 받은 사람중에 과연 몇 %가 지난 세금보고를 스스로 수정하여 다시 보고하겠는가 ?
미국은 결혼과 이혼 혹은 결혼무효에 대한 결정은 주법원에서 결정하고 그 기록은 개인의 기록으로만 남지 한국처럼 호적이나 가족관계증명서중 혼인관계증명서에 기록이 남길수 있는 전국화된 정보시스템이 없다. 더우기 범죄기록과 달리 결혼에 관련된 기록은 개인기록이라서 남이 함부로 볼수가 없다.
만일 2015 혹은 그 이후에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여 부부공동보고를 해도 국세청에서는 그 세무보고에 대해 감사를 하지 않는한 (중산층이 감사당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재혼한줄 알지 전결혼이 무효가 되어 지난간 세금정정보고의무가 있다는 것을 추정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마인드 (이런것이 한국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가 바뀌는 경우 의무적으로 그 이전 결혼의 상태에 대해 (이혼인지 무효인지) 물어보는 항목을 세금보고서에 만들든지 아니면 국세청직원이 개별적으로 납세자에게 서신을 보내 이혼서류사본을 보내라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하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는다. 인력이나 예산이 부족해서도 힘들지만 그런 식으로 법적인 개연성을 두고 그것을 추정된 범죄의도로 간주할 행정기관의 법적인 집행권리보다 개인의 사생활보호에 헌법이 더 우선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금보고의 기본정신이 이것이다. 아무리 상황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보고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간보고수치 즉....고용주가 피고용인에 지급한 임금내역이나 이자나 배당금수입을 특정인에게 지급했다는 금융기관의 수치와 개인의 세금보고내용이 일치할때는) 일단은 그 세금보고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준다. 결혼무효를 했으면서도 과거의 세금내역을 정정보고하지 않는사람이나 많이 벌어도 적게 보고하는 자영업자들은 이런 정부의 신뢰를 이용하여 개인이 세금을 착복하는 것이다.
한국도 기본적으로 비슷하고 미국에 있는 다른 민족들도 비슷하겠지만 한국이민자들중에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헀던 자영업자 (특히 델리가게같은 소비자로 부터 세일즈텍스를 직접 징수하는 업종)는 그 포탈한 세금이 그들이 모은 재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민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수 있음은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민이 장기체류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자와 다른 이유는 법적인 용어로 Legal resident 와 non-resident 의 차이에서 찾을수 있다. Legal resident 는 자신이 선택한 국가가 주는 법적인 혜택과 신뢰의 프리미엄을 받는 대신에 그 받은 것 만큼 사회에 반환해야하는 법적이고 도적적인 의무를 묵시적이며 명시적으로 동의하는 계약관계의 성립을 이민이라고 정의내릴수 있다.
만일에 포탈한 세금이 상당수가 되어 그것을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투자할수 없는 현찰로만 보관해야 한다면 그사람은 그돈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할수 없다. 우선 안전하게 둘 곳도 마땅찮아 자신이나 가족만 아는 비밀스런 곳에 보관해 두고 늘 신경을 써야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상황이 한인이민사회에 적지 않은 퍼센티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현찰은 따로 관리하면서 노인아파트나 웰페어를 타먹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철면피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돈벌이하거나 사기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에 이제 막 분양을 앞둔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를 미주교포들에게 특별분양한다고 하며 계약금과 잔금은 한국의 친적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대신 납부하더라도 본인명의로 등기가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업자들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비밀리에 관리하던 현찰을 소위 버팅이라는 현찰교환을 통해 (한국서 원화받고 미국서 달러를 지불하는) 돈을 몰래 한국으로 보낸후에 자신의 명의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세를 놓던지 관리업체에 맡긴다. 이과정에서 사기를 당한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더 많은 경우가 사기를 당하지 않고 본인명의의 재산을 본국에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미국온지 30년 40년이 되고 돈을 벌고 자식교육을 잘 시켜서 주위의 부러움을 받는다고 해도 나의 정의대로라면 미국에 이민온 사람이 아니다. 이민온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본국으로 돌아갈려고 그동안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두개의 경제문화환경의 켄텍스트 (economic and cultural context) 에 놓고 마치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생명체의 선택적우위 (selective advantage) 를 이용해 개인의 욕망을 채운 것이다. 그 욕망이 차면서 비례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준 신뢰의 프리미엄을 교묘하게 배반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배반의 정도와 질이 나쁠수록 그는 다른사람들의 눈에는 성공한 이민자로 보여 질수도 있다.
미국이 한국보다 자국민에 대한 신뢰가 높다든지 그것을 보장하는 법제도가 잘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그런 신뢰가 계속적으로 부작용을 낳고 정직한 구성원들이 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사회의 구태의연함이 더 문제일수도 있다.
나의 글의 요점은 사람은 삶의 자리를 옮길때 개인이 원하는 행복의 총량에 도달할수 있는 선택적우위상황을 저울질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는지 아니면 오산이였는지도 중간 점검을 하면서 또다른 선택을 감행할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식을 존중하는 대부분의 시민사회는 다 나름대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사회의 일원이 되기는 꺼려하면서 자신의 계산과 예측만이 적중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영원한 여행자로 남을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미 150년전 베를린대학의 천재수학자 Bernhard Riemann 이 증명하였다. 시작과 끝이 규정된 1,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중심이 없어 어떤 표면내의 점이나 선을 한 곳으로귀결시킬수 있다면 (공같은 sphere) 플러스 1 과 마이너스 1은 같은 것이고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을 합한 것도 합하지 않은 두개의 독립변수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민상황으로 적용해 풀어보면 이민을 와도 이민을 오지 않아도 그리고 이민을 왔다고 다시 돌아가도 혹은 이민온 곳을 베이스로 두고 한국을 자주 방문해도 결국 만족은 변함이 없다. 세계는 같은 상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어도 봄은 오고 또 봄날은 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 찬란한 봄을 스스로 즐길수 있는 내공을 키워야....
JEFF
(4) Dead Man Walking
지금은 TV 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지만 직업의식인지 몰라도 평범한 스크린의 장면도 유난히 오래 기억남는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젊은 (아니 어리다고 표현해야) 아들이 수갑을 찬채로 경찰차의 뒷자석에 실려 떠나는 모습을 그 아들의 어머니가 힘없이 쳐다 보는 장면이다. (미국 TV 나 영화에선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관심없이 보았겠지만 이런 장면이 나올때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1) 떠나는 경찰차를 쳐다보는 어머니는 거의 울지 않는다. (2)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 나가든지 어머니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곧 그 어머니는 돌아서서 울음을 터트린다. (3) 그리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후 힘껏 빨아 당긴다. (4) 그 어머니는 날씬함과는 거리가 먼 비만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 "죽은자가 걸어가고 있다 (Dead Man Walking) "... 1995년에 소개된 이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인상에 오래 남는다. 사형을 당하는 젊은 남자와 그 남자를 마지막까지 설득하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중년의 수녀....
자신이 죽이고 성폭행한 남자와 여자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형수와 사회정의를 위해 빨리 사형시켜야 한다는 피해자의 부모들을 설득하는 수녀...그들은 사형수가 독극물주사를 이용해 사형당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본다. 그 시간 집에서 아들의 마지막을 상상하던 어머니는 오열하고 쓰러진다.
루이지애나 (Louisiana)... 미국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무척 더운 남부의 주이고 그래서 이런 저런 범죄들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 범죄를 막는 방법으로 형사사건에 대한 처벌이 엄청 강하고 웬만한 중범자에 대한 사형이 가장 많은 주이며 사형수에 대한 사면 역시 거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주이다.
"Oh mother ! Tell your children not to do what I have done.... spend your life in the sin and misery in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어머니 !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처럼 살지 않토록 가르치세요... 나처럼 외로운 소년원에서 후회와 비참함을 삼키며 인생을 보내지 않토록 하세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따라 불렀던 흘러간 팝송의 가사이다. 어머니는 옷 수선공이였고 아버지는 도박꾼이였던 자식은 감옥에 갇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고 있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게 변하고 있다. 돈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생긴것도 이쁘고 몸도 건강하며 성격도 좋아 그들의 부모를 즐겁게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자신의 자식들도 그렇게 키울것이다.
나는 가끔 신에게 기도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돈많은 부자가 예수께 찾아와 구원의 방법을 물었을때 가진 모든 것을 팔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답하신 것 처럼 나의 새로운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내자식의 부모라는 운명적이고 생물학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는 순간에서 시작될 것 같다.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내가 고생해 도달한 죄와 정의와 구원의 그럴듯한 정리는 자기만족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가방을 챙기며 허둥되는 나의 오래된 새벽녁의 악몽은 현실속에서도 자주 반복된다. JEFF
(5) The Universe Within by Neil Shubin
생체시계라는 용어가 있다. Biological watch 라고도 하고 Molecular watch 라고도 한다.
외부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더라도 우리의 몸에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맞게 신진대사를 움직이는 생체리듬이 있다는 이론인데 세포내의 DNA 의 단백질합성의 흐름과 패턴이 오랜시간 환경의 영향으로 이미 내재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기도 한다.
그 환경의 대표적인 것이 빛이다. 빛의 자극과 순환적인 패턴이 생체의 리듬을 만들고 생명체가 환경의 변화를 인지해 시간의 흐름을 추정하는 것이다.
... 하루는 24시간인데 왜 한 시간은 60분이고 1분은 60초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하지만 10진법을 쓰지 않고 60진법을 쓰고 있다. 60진법은 수천년전 바빌론문명에서 도입된 계산법인데 이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생존할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
60은 1,2,3,4,5,6, 모두로 나누어진다. 즉 첫짜리숫자 6을 구성하는 6개의 자연수단위 모두가 작은 구성성분으로 집합될수 있는 두자리 숫자가 60이다.
예로 30이라는 숫자와 70이라는 숫자를 60과 비교해 보자. 1,2,3 으로 30을 나눌수 있지만 60보다 작고 70은 60보다는 크지만 1,2,5,7 만으로 70을 나눌수 있다. 60은 첫자리의 구성요소가 두째자리 숫자와 같은 비례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최대의 숫자이다. 만약 그런 패턴을 이용해 환경의 변화를 아주 작은 단위로 세분화한다고 하여도 시작과 중간의 관계성이 변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망원경의 두개의 렌즈를 이용하여 빛을 반사시켜 외부의 대상에 촛점을 가장 가깝게 맞출수 있는 구조처럼 보인다.
60분 60초는 어떤 변화의 흐름이라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측정할수 있는 방향성 (pattern of directive change) 을 가진 구조적인 사고에서 탄생한 듯하다. 이것은 나자신의 생각이다. 우리에게 하루 24시간 1440분이 주어지는 이유는 지구가 자전하는 이유이고 태양의 빛이 우리에게 오는 변화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패턴화시킨 결과이다.
생물학자 Neil Shubin 은 그의 책 "The Universe Within" 에서 모든 생명체와 지구를 구성하는 암석층은 물리적이든 화학적이든 우주공간의 변화를 어떤식으로 패턴화하여 내재하는 존재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 인간속에 있는 우주의 역사를 찾아내는 그의 예지가 대단해 보인다. JEFF
(6)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많은데 그 다름을 가능케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인간은 두뇌가 발달하여 도구를 발명하고 그로 인해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기억력이 좋아 과거의 일이 재현될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동물보다 뛰어나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계획하고 그리고 그 계획을 수정하는 지적인 능력이 있다. 즉 과거와 현실 그리고 가상현실과 진행중인 현상을 비교분석하는 구별된 능력이 있다.
이런 의식의 영역을 관장하고 수준있는 사고를 가능케하는 신경의 생화적인 네트워크에 무엇이 더해졌을까 ?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찾아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어 양성자와 전자 중성자의 역학관계를 상상하듯 인간의 의식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면 마지막으로 남는 아주 희미한 원초적인 욕구는 무엇일까 ?
나는 이문제를 꽤 오랜 시간 생각을 해 보았다. 정답이 있을수 없는 문제이기에 시간날때마다 조금씩 정리해 보았는데 역시 어려운 문제이다. 이문제를 푸는 한가지 그럴듯한 방법은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뼈대를 하나씩 하나씩 역으로 부셔가는 것이다.
(1) 시간의 한 방향성을 부정하고 시간의 역행성을 인정하면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는 의식의 편이를 위해 만든 사고의 차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 시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할수 없는 것이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기에 공간의 필연성에 대한 의심도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이두가지가 없으면 인간의 의식은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수 없기에 사고의 실용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중간결론은 시간과 공간이 특정한 방식으로 두뇌의 신경회로에 집중되는 부분과 그것이 해체되는 부분의 연결고리에 존재하는 어떤 에너지의 타입을 찾는 것이 문제해결에 대한 실마리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일단 오랜 기억 (Long term memory)을 예로 들자. 평소의 경험이 패턴화된 양식으로 발전하여 뇌의 한부분에 시공간의 특수한 조합으로 저장된다. 인간은 그런 기억을 가끔씩 의식의 영역으로 다시 전환시켜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규정하고 제어하는데 활용한다.
그런데 어느날 그 기억의 패턴이 급작스럽게 변할때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 기억을 구성했던 시간의 방향성을 부정하고 공간의 제한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구성했던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고 마치 정교한 실험도구를 거쳐 검출된 여과물처럼 원초적인 욕구가 나온다. 나는 그것이 바로 "기다림" 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에서 출발하였지만 동물과 구별되는 의식을 가능케했던 모든 의도적인 사고의 기반에는 기다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환경의 공포를 이겨내고 정신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인류학자들이 설명하지만 인간에게 종교보다 더 원초적인 것이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종교자체가 될수 없지만 종교는 기다림의 한 형태이다. 기다림의 명분과 자세가 논리적이고 감동적일수록 그 종교는 생명력이 강하다.
인간은 특정한 대상이나 불특정한 가능성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기억의 재구성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허구성을 맛보는 과정을 동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허구성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과거의 현상은 추상적인 의미로 다시 탄생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다림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고 기다림이란 것이 비효율성이나 무능력의 동의어처럼 인식되는 현실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서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욕구들은 상당히 동물적일수 밖에 없다.
강의중에 쓰러져 더이상 자기에게 찾아오지 않는 주인을 한없이 기다리는 한 생명체 (영화 하치이야기중에서) ... 우리는 그 동물의 머리속을 분석할수는 없지만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주인에 대한 기억은 인과관계가 맞지않는 상태로 부셔져 가고 이동물도 원초적인 욕구에 다가 가게 된다.
오지않는 주인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같은 개가 되든지 아니면 오지않는 것이 자신을 버린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한없는 기다림을 택하는 개의 모습을 한 인간이 되든지...
외로움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나는 오지않는 누군가를 그리고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이 깊어질수록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기다림은 나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다. JEFF
(7) 프린스톤대학이 일등인 이유
미국온 이후로 시간날때마다 명문대학을 방문해서 그학교를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취미가 되었다. 모든 명문대학은 나름대로 학문적인 권위와 자존심이 있는데 역사가 깃든 건물뿐 아니라 캠퍼스 곳곳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보아도 알수 있다.
1987년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대학을 처음 방문했었다. 고색창연한 아이비리그의 자태를 제대로 풍기는 캠퍼스를 둘러보고 어떤 조각상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백인이 손에 칼을 들고 두손이 묶여 있는 젊은 남자를 죽일려고 하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노예를 수입해와 힘든 일을 시킬때 그들의 인권을 유린했던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16-7 세기 유럽의 강국들이 세계로 뻗어 나갈때 그들의 오만함이 정복한 땅의 원주민에게 투영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거라는 정도였다.
"과거의 역사를 잊지말고 정의편에 서는 지성인이 되자" 정도로...
그런데 며칠전에 갑자기 그 조각상이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이 확인되었다.
놀랍게도 칼을 든 사람은 아버지이고 무릎을 끓고 애원하는 젊은 남자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브라함이고 아들의 이름은 이삭이다. (조각가 George Segel 작품)
구약성경에 나오는대로 야웨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버지는 칼을 들었다. 구약시대의 상황과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요즘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일수도 있다. 왜 이런 작품이 명문대 캠퍼스의 한 가운데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조각품이 있는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이학교의 주요 건물 두개가 나온다. 왼쪽으로 꺽어지면 중앙도서관 (Firestone Library) 이 있고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아름다운 채플(University Chapel)이 나온다. 일단 이 조각품을 오래전에 캠퍼스에 전시한 학교당국의 의도는 짐작할수 있다. 프린스턴대학은 철저한 기독교정신(장로교)에 입각하여 세운 학교이다. 그래서 교육이념으로 지성의 훈련은 절대자에게 복종하고 그 뜻을 세상속에 펴가는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한다고 정하였다.
이학교는 돈되는 3개 대학원이 없다. 법대, 의대, 경영대학원... 만약 이 3개의 전문대학원을 키웠다면 세계최대의 도시인 뉴욕을 끼고 있는 지리적인 잇점을 이용해 그동안 전문대학원 출신들의 성공한 동문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업(?)을 하지 않아도 이대학은 US News and World Report 의 대학랭킹에서 항상 하바드와 함께 공동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관심있는 수학과 물리학분야만 놓고 본다면 지난 반세기동안 이대학의 동문들이나 교수진은 굉장하다. 수학계의 최대 난제였던 350년된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Andrew Wiles 도 영화 Beautiful Minds 의 실제 주인공이였던 John Nash 도 이대학 교수였고 아인쉬타인도 이대학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였고 미국의 대표적인 물리학자였던 Richard Feynman도 칼텍에서 교수생활을 했지만 프린스턴대학서 박사를 하였다. 70년대 80년대 한국의 인기스포츠였던 고교야구와 비교하면 선린상고, 광주일고, 부산고를 합쳐서 한팀을 만든 정도로 얘기할수 있다.
작년봄에 한국을 뒤집어 놓았던 세월호사건이 터졌을때 인터넷에 오른 사진을 보고 나는 내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 사진은 세월호의 사주가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언론의 조명속에 울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 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였다. 나는 글로서 분명히 밝혔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만일에 내아들이 저 뱃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는 종교인들을 저주하고 사주를 지옥까지 쫒아가서 죽여 버리겠다"고...
자신의 핏줄앞에서 확연히 들어나는 것이 내자신의 모순이고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고 인간지성의 한계이다. 학문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런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낀다. 자신이 만든 편견과 자신이 선호하는 관점과 우리의 이해관계를 정당화시켜 주는 논리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합리화를 과감히 극복하지 못한다면 진리의 세계는 요원하고 끝없는 갈등과 분쟁만 계속된다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동상이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인간은 영원히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을 잘 알기에 자신의 분신인 자식의 애원에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기도하기 위해 어느날 아침에는 채플로 가고 그래도 나약하지만 객관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또 다른 아침에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우리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였다. 신의 뜻에 따라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든 아버지의 검은 동상을 보면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었다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본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구성(plot)도 위대하고 스토리(story)도 감동적이다.
물이 세상과 생물을 화학적으로 만들었다면 그 물보다 진한 피의 역사가 인류를 진화시켰다. 그진화의 원동력은 고난이다. 그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류의 역사에 감히 발전이라는 상상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자식의 애처로운 눈길을 포기하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할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나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모든 부모들에게 감히 고한다. 자식은 바로 우리들의 거울이고 인간적인 한계이다. 자식의 모습에서 꽃만 보이고 잡초를 발견하지 못하면 인류역사의 진보란 없다. 그리고 우리보다 못한 이웃의 자식들의 얼굴에서 그들을 향한 신의 섭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신이 만든 편견과 그 편견이 만들어 내는 사고의 우상속에서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진리의 가치는 그런 노예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곳에 있다.
(8) Made in Korea 명품 서울여상
서울여상에 대한 글은 몇년전에 다른 곳에서 쓴 적이 있지만 제가 서울여상출신이 아니기에 동시에 서울여상출신이 쓴 모교에 대한 글이 아니기에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소개하여 객관적인 이해에 충실할려고 노력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아래에 소개할 책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의 관점 (조금 특이하지만)에 기준하여 왜 서울여상이란 학교가 한국적인 명품학교인지 그 논지를 정리하여 요약했읍니다.
1. 어느 학부모가 진솔하게 표현한 긍정적인 이해
" (인용시작) ...전용면적12평에서 20평으로. 노후 빌라에서 나홀로 아파트로, 주차장을 갖추었고, 단지 주거환경을 개선했는데, 공사대금을 내느라 1억3천만원에 대한 대출원리금을 월100만원 이상 15년 갚아야 하는 하우스푸어가 되었습니다. 행정7급 공무원인 남편 월급으로 세자녀 사교육은 피아노교육 빼고는 시켜보지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으므로 큰아이에게 특성화고교인 서울여상을 소개했습니다.
아이는 설명회를 다녀오더니 '결정했다'며 준비했습니다. 딸아이가 사교육 안받고 중학교 내신17%는 저에게 고마운성적이었습니다. 다른아이의 1%보다 제 아이가 땀흘려 노력한 17%가 저에게는 힘이 됩니다.올해 서울여상 내신평균이 13.2%라고 하는데 커트라인이 20%라고 합니다. 제 아이는 3월2일 입학후 8일부터 학교에서 석식을 하고 방과후학교를 신청해서 공부하고, 자율학습을 하고 밤9시~10시경 귀가합니다. 저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1시간30분가량 걸리는 통학거리를 불편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람맞춰 일어나고 저는 아이에게 격려가 되기 위해 아이보다 30분 먼저 5시30분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준비합니다.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저와 딸은 불평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제가 칭찬하는 내용은 서울여상은 사교육없이 방과후학교와 교내수업만으로 각종 자격증을 따고 내신으로 취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잠실에서 딸아이 친구들은 학원을 1-2군데 이상다니는데, 내 아이는 그런 혜택없이 시험에서 경쟁하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경쟁력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원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딸이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볼때 저는 서울여상에 대해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갖습니다.
서울여상에서는 750명 학생들이 충분히 자율학습을 하도록 교실도 개방해 주시고, 적절한 시기에 방과후과목을 개설해 주셔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합니다. 아이는 낯선 과목을 배우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노력하려는 자세를 볼때 서울여상의 교육방침. 교장선생님. 교무부장님. 담임선생님. .... 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학생들 교복에서도 단정한 생활지도... 가정경제가 조금 어렵지만, 자녀가 힘내서 공부하니 공교육기관인 학교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서울여상이 더욱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울여상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취업후 진학을 목적으로 입학했고, 제 아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학교측의 따뜻한 인성교육으로 아이들이 주눅들지 않고, 낯선 학부모에게도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은 타 학교에서는 볼수 없었던 모습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성적지상주의 , s.k.y대학내지 in서울대학진학을 위해 어른 아이 구별못하는 현 세태에서 비록 할아버지와 부모의경제력이 약해서 진학했지만, 아이가 행복하게 학교생활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등교하고, 밤 늦게까지 학업에 집중하는 서울여상 학생들 모두 건승하기를 바랍니다. (인용끝)"
2. 댓글에 달린 다양한 시각들
(1)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취지가 왜곡된 한국 교육의 실체를 생각해볼때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되지만 교육 그자체의 목적이 직업훈련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저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읍니다.
(2) 서울여상을 지나갈 때 거기에 달린 현수막은 죄다 자겨증 딴 내용만 있어요. 고등학교가 단지 취업만이 목적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만 하는 것이나 취직하기 위해 공부만 하는 것이나 다를게 없어요.
(3) 저희때 부턴가 인문계는 개나 소나 다가고 상업계열 공업계열의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친그들이 많이 갔습니다. 현재 지나고 보니 중학동창중에서 SKY 에 간 친구들보다 상고 공고로 진학한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 잘사는 경우도 많아요. 이런 얘기 아무리 해도 대한민국 대학수는 반으로 절대 줄일수는 없어요, 대학교수들 밥그릇 문제로....
3. 댓글에 대한 저의 답글
우리는 서울여상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과 판단을 대신할수 없읍니다. 서울여상이 있다면 덕수상고나 부산상고가 있읍니다. 그쪽 출신 친구들도 꽤 됩니다. 고등학교때 주산암산 자격증따서 취업은 쉽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인생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항상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 대학진학 대학원진학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여상진학해서 바로 취직한다고 해서 인생을 그런 관점에서만 중요시하는 것도 아닐것 같고 아마 그들도 여유만 되었다면 대학진학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교육의 주체는 인간자신입니다. 교육의 환경과 내용이 이상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목적이 이기적이면 대학교육도 문제가 많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나 미국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제의 중심에는 좋은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있읍니다.
왜 아직도 한국사회는 직업기술과 연관되는 분야의 교육은 다른 인문사회과학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지 알수 없습니다. 직업기술에 대한 교육을 어릴적부터 받았다고 제대로 된 인성교육이나 자신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볼수 있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선비와 그들의 계급의식을 우대시하던 구시대의 사고에 기인한 오래된 편견입니다.
4. 책소개와 저의 생각 정리
이책에서 저자는 [1. 현장의 요구를 파악하고] [2. 기초에 충실한 교육을 하고] [3. 건강한 문화를 통한 건강한 인재를 지향하고] [4. 균형감각을 갖춘 인재를 기르고] [5. 실질적인 경쟁력] 을 갖춘 것이 서울 여상이라고 소개합니다.
상당히 학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홍보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나름대로 직업학교라는 과거의 관점을 탈피하려고 한 저자의 노력을 확인할수 있었읍니다.
인간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를 평가를 할때 가끔씩 저는 생물학적인 진화론의 관점을 씁니다. 그때 사용하는 두가지 관점은 (1) 환경의 도전에 대한 개별생명체의 적응능력 (adaptability) 과 (2) 자신의 시스템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가치추구를 유발하고 규범화하는 내재적인 능력 (sustainability) 입니다.
이두가지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같이 적용되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생존능력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보강 (feedback and re-enforce)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치를 창조하여 내재적인 규범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직과 국가는 문화사회적이고 정치경제적인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존방식은 한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브랜드가치로 존재할수 있읍니다.
서울여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 두가지 관점을 경쟁구도에 기초한 동물적인 본능으로 보는 피상적인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과 취업교육이 돈을 버는데 집중하여 그들의 경제적인 생존능력만 조금 높인다고 보는 견해이지요.
저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교육이든지 아니면 일반학교에서 수업하는 학문의 내용이든지 교육의 현실적인 목적과 방법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스스로 배양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런 교육의 출발은 세상과 자기자신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경제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경쟁력을 키우면서 그것을 인생의 발전을 위한 교육적인 소양으로 삼는다면 서울여상이 대표적인 직업학교라고 하여도 수준있는 교육기관임에 틀림없습니다. 너무나 한국적이고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생존의 방식을 터득하는 인생교육의 현장입니다. 세계최고의 교육환경을 자랑하는 미국에 살면서도 가끔은 그런 통제되고 목적이 분명한 현실교육의 현장이 그리워 질때도 있읍니다.
나는 서울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것이 있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남의 도움도 필요없다.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보는 것이다. 왜 15시간을 비행기타고 가서 겨우 지하철 2호선 이냐고요 ?
한국 TV 에 "다큐멘타리 3일" 이란 프로가 있다. (지금도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72시간동안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얘기를 생활현장과 함께 화면에 담아 인기인들의 나레이터로 50분간 방영하는데 2009년 말쯤인가 "서울지하철 2호선"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세계에서 단일지하철 노선으로 하루 이용객이 가장 많다는 서울의 황금노선이자 순환노선, 새벽 5시가 되자마자 신도림역출구가 열리고 무가지 몇장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는 직장인들 얘기부터.
사당지하철역 의자에 앉아 이미 60대, 40대가 된 언니동생이 300원짜리 자판기커피를 뽑아 들고 "언니나 나나 지하철역 근처에 살기 때문에 딱 중간인 여기서 만나서 줄것 주고 얘기하면 참 좋다"며 동생이 담근 물김치를 언니에게 주며 지난얘기 꽃을 피우는 자매.
아들이 40이 넘었는데 지병으로 현대아산병원에 누워있다며 지하철칸을 돌며 신문지를 수거해 고물상에 팔아 아들약값에 보태겠다며 굽은 허리로 지하철내부를 돌아다니는 70대 노모.
"제가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어머니를 곁에서 자주 뵙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전화할때마다 하신 말씀을 하고 또 하고 해서. 그게 치매인지는 몰랐어요. 이제 회사에서 명퇴하고 시간이 많으니까 매일 어머님을 병문안하러 2 호선을 타고 갑니다" 검은 뿔테안경을 낀 57살의 아들이 90세 노모를 찾아가는 모습.
"아니 정말 어이가 없네. 정말 너무하네요. 내보따리 얼마나 한다고 그걸 훔쳐가다니" 남대문에서 아기내복을 도매로 떼와 사람들 많이 지나 다니는 종로3가역 매표창구 앞에서 단속을 피해 노점하던 아저씨 옷보따리를 화장실 다녀오던 사이에 누가 훔쳐갔다.
"살기 힘들다 힘들다 해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는 모양이네요" 카메라앞에서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한 50대 아저씨.
"그냥 가는 거예요. 안가면 찍히니까" 오늘 회식이 있다며 저녁 퇴근길에 직장동료 몇이서 2호선을 타고 뚝섬역까지 간다는 50대 중반의 남성들. "회사생활이야 힘들지만 힘들다고 얘기할수 있나요. 우리 나이에 붙어 있는거만 해도 다행이죠." 회사로고가 찍힌 짙은 권색잠바의 중소기업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자식들 눈치보기 싫어. 아침에 2시간만 일하면 용돈은 나와" 매일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강남역에 청소하러 간다는 60대 중반 할머니 "돈벌고 운동되고 얼마나 좋아" 그얘기가 맞다고 맞장구치는 청소하는 할머니들이 새벽지하철안에 가득하다.
"누가 얘기했죠. 인생은 고해라고. 정말 사는게 장난이 아니예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조그만 과외학원을 한다는 40대 후반의 아줌마 11:40분 막차를 타고 교대역에서 막내리며 핸드폰벨소리를 듣고 기자에게 얘기한다.
"우리딸이예요. 요시간만 되면 엄마 잘오고 있는지 꼭 전화해줘요. 이전화 받으면 하루피로가 싹 가셔요" "그래 엄마야 나 지금 지하철에서 내렸어. 10분내로 집에 들어갈것 같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그리고 지하철 2호선이 뚝섬, 한양대역 부근을 지날때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서울의 모습이 보이고 들국화 멤버였던 전인권의 노래 "돌고 돌고 돌고 돌고"가 흘러나온다.
세상은 정말 돌고 돈다.
오늘은 Citi Bank 와 Bank of America 주식 갖고 있는 사람은 쾌재를 부른날이었다. 아마 1년기준하여 최고로 많이 오른 날이었다. 몇년전부터 이주식을 사모은 친구놈은 오늘 술먹자고 연락왔다.
오전에 발표한 지난달 소매경기가 예상치를 넘어 좋았고 오후 2시에 버냉키 연준의장이 미국의 인플레걱정은 일시적이다라고 낙관했고 장막판 Chase 은행이 15 billion 자사주식을 사들이겠다는 발표가 있자 은행주는 급상승했다.
나도 소주를 한잔 먹어야겠지만 이유는 반대이다. 지난 5년간 침체를 면치 못했던 부동산펀드에 연초부터 돈을 옮겼는데 재미가 없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회복되리라는 부동산시장을 미리 낙관한 것이다. 옆집처녀가 결혼할 마음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혼자서 예식장부터 잡아놓은 격이다.
인생은 주식시장이나 지하철 2호선처럼 돌고 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움직이고 바빠지고 걷는사람 뛰는 사람 서로 다르게 같은 시간속에 다시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전인권의 노래중)
마치 절대군주가 된것처럼 폼을 잡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안양교도소로 향한다. 화려한 브라운관에서 애절한 여주인공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여인도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뉴스에 나온다.
한국 좋다고 미국서 돌아가는 사람 그래도 미국이 좋았다며 다시 돌아오는 사람 인생은 돌고 돌고 돌아 인천공항만 바쁘게 돌아간다.
그래 오늘은 홍대역에서 내려 마포 주물럭갈비에 소주 한잔, 내일은 사당역에 내려 버팔로 윙에 생맥주 한잔, 모래는 왕십리역에 내려 시장에서 파전부쳐 막걸리 한잔. 아 돈다 돌아. 술취해 돌고 2호선 타고 돌고 한국미국왔다갔다 돌고 주식 올랐다내렸다 돌고 내인생도 돌고 돈다.
나는 가끔 사람이 그립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 생각이나 관심사가 비슷하고 내가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는사람, 가까이 가면 내가 자주 먹던 음식냄새가 옷에서 나는 사람, 그 사람들과 가까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말없이 그냥 서있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마치 그들의 표정은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의 모습과도 같다. 맞다. 그들은 철학자들이다.
대학을 가기위해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몸으로 인생의 교훈을 터득한 나의 스승들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들과 함께 복잡한 강의실에서 몸을 부딪치며 같이 있다. 그 강의실의 이름은 지하철 2호선.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것,너무 좋아할 필요도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겸허한 배움의 현장이다.
(1)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곳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쓴 글이 있었는데 글의 주인공이였던 R 형님은 2013년 위암말기로 한국의 국립암센터에서 수술후 의식을 찾지 못하고 바로 세상을 뜨셨다.
그는 미국생활 25년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무리 짓던 중 위암판정을 받고 미국서는 수술이 힘들다고 하여 한국까지 간 것이다. 경남 통영으로 갈려다가 경기도 시흥으로 결정해 그곳에 다세대주택을 구입하였다.
아들만 둘이였는데 작은 아들이 권총강도로 3년형을 받고 미국형무소에 복역을 한 후 한국으로 추방되면서 한국행을 굳힌 듯 하였다. 젊은 시절 월남까지 가서 고생을 했지만 자식을 감옥에 보낸 후 괜히 미국에 왔다며 술로 세월을 보낸 휴유증이 병으로 온 것 같았다.
... 1949년생이던 R 형님은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낮에는 지붕고치는 업자들을 따라 다니며 귀국자금을 모았다. 어느날 지붕고치다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쳤고 쇠를 다리에 박아 걷는 것도 불편하셨던 분이였는데 예정된 귀향을 몇달 앞두고 결국 말기암환자가 되어 인천공항에 내리는 운명이 되었다.
안동권씨 몇대손이라고 항상 입에 달던 K 형님은 2007년 뉴저지 안쪽으로 이사를 가신후 나의 사무실에 들러서 소주한잔 하는 낙을 포기했다. 한국서 종합병원 간호사였던 형수는 네일가게를 그쪽에 열었고 아예 집까지 이사를 한 것이다.
아침에 문을 열어 주고 직원들이 퇴근한 후 빈가게 청소하는 일이 전부였던 K 형님은 이렇게 살 바에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전화도 가끔 하셨는데 2011년 가을 가족들이 없는 집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저녁에 가족들이 돌아와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C 형님 (53년생) 을 안 것은 15년 정도된다. 영주권을 신청하면서 사기를 당했고 그이후로는 포기하고 있던 중에 다행히 군대간 둘째아들이 시민권을 받아 작년말에 C 형님과 형수가 영주권신청을 재개하였다.
몇년만에 다시 만난 C 형님을 보는 순간 너무 놀랬다. 그전에 동네골프장에서 뵈었을땐 건강하였는데 몸이 반쪽이 되였다. 위암에 식도암까지 겹쳐 작년에 죽는 줄 알았다며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형님이 오늘 나에게 전화하였다. 더 이상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기가 힘들것 같다고 하면서 암이 재발하였는데 의사는 마지막까지 해보자고 하지만 아무래도 힘들것 같다고 하였다. 1994년에 미국 왔으니까 21년째 한번도 못 간 고국에 죽기전에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유난이 눈물이 없던 나에게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눈물은 그냥 한국서 계속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유럽이나 캐나다와 달리 미국은 불법체류자들이 참 많다. 어제밤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미국생활 다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아들...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오늘밤이라도 돌아가겠다는 딸...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거라는 것...아니 저세상으로 떠나는 부모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단 1-2주도 다녀 올수 없다는 것... 그들의 신분이 그리고 그들따라 미국에 온 어린 자식들을 다시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또 내가 없으면 하루도 돌아가지 않는 작은 가게가 그들의 족쇠이다.
인터넷 스마트폰이 흔하디 흔한 지금의 세상에 떠나온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있고 힘든 하루를 마감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를 보고 마음을 쓰러내리는 사람들이 내주위에 많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수 있는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지구의 저편 회색의 거리에 오래동안 남아 그들의 사연과 아픔을 가슴깊이 목격할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이 접근하지 못한 존재의 진실을 떠나온 자들의 눈물에서 찾을 것이다. 그리고 3천년전 유랑의 땅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사야선지자의 예지를 오늘에 되새기며 소외되고 잊혀진 나와 같은 백성들의 희망을 글로 남길 것이다. JEFF
(2) 아버지와 아들 (I)
이문장을 Daum 의 언어섹션에서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A long life may not be good enough, but a good life is long enough" (긴 인생은 충분히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 아주 쉬운 단어만 사용된 문장이라고 해서 이런식으로 직역을 하면 글을 쓴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이문장의 번역을 맡기면 이렇게 해석하겠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래사는 것보다 제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이문장을 쓴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 (1706-1790) 이다. 미국의 건국사에 빠질수 없는 애국자이자 선각자이다. 그는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미국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기록될 만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국민에게는 그것만으로 좋은 것 (good) 이 될수는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아쉬움으로 남는 기억이 있었다.
그에겐 자신을 닮은 총명한 아들(William Franklin)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은 자식이였다. 아버지 벤자민은 아들 윌리암을 명문법대를 졸업시키고 정계에 진출시켰으나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영국의 식민지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는 보수세력을 규합하여 뉴저지의 주지사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아들은 영국편에 서서 미국의 독립전쟁을 저지하다가 영국군대가 자국으로 후퇴할때 같이 영국으로 떠났고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 후대의 사람들은 아들 윌리암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성장했을거라는 추측하고 있다. 윌리암은 아버지의 정식 자식이 아니고 사생아였다. 윌리암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인다고 그런 아들 윌리암도 역시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사생아 (Temple) 를 낳아서 기른다.
그리고 영국으로 도망간 아들 윌리암은 자신의 자식인 템플을 버리게 된다. 오랫동안 아들의 행적을 비밀리에 추적한 아버지 벤자민은 그의 손자인 템플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손자를 미국으로 데려와 뒷바라지를 한다.
벤자민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긴 인생을 살았지만 버려진 손자를 다시 데려와 키우기 전까지는 아들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을 없앨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인생을 제대로 살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자신에게 있다. 세상이 주는 어떤 직함보다도 아버지라는 이름이 더 소중하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JEFF
(3) 결혼무효와 신뢰
법적인 용어로 결혼무효 (annulment)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혼 (divorce) 과는 다른 것이다. 이혼은 결혼상방이 결혼의 성립을 의심하지 않으나 그후의 이런저런 사유로 결혼의 사회적이고 법적인 고리를 스스로 끊는 것이다 (합의든 아니면 법원의 결정으로든) 결혼무효는 처음부터 결혼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쪽이 증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속아서 결혼하는 것은 여기에 포함된다. 총각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타주에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했었고 (그 결혼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가정) 혹은 동성연애도 합법인 지금의 미국에서는 레즈비안인줄 알았더니 레즈비안과 이성(남성)과의 성관계를 다 유지하는 파트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등... 혹은 결혼은 안했지만 숨겨놓은 자식이 있었다는 등.. 학자금융자를 다 갚았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는 등.... 참 사유도 많다.
미국은 참으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는 문화를 유지하기에 거기에 맞추어 그들의 사고나 행동을 규정하는 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실정법과 판례법을 같은 무게로 두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이나라에서는 법규정상으로는 분명히 같은 범법행위를 했어도 반드시 Hearing 이라는 절차를 거쳐 개별적인 상황에 맞게 규정이 적용될수 있는 기회를 피고에게 부여한다. (헌법상에 보장된 Due Process of Law 의 권리이다)
결혼을 하면 세금보고상에 Married Filing Jointly (부부가 같이 같은 세금양식으로 보고하는) 할수가 있는데 이것은 두사람이 싱글이였을때나 혹은 결혼 후에라도 각자보고 (Married Filing Separately) 는 것보다 세금의 혜택이 많다. (공제조항이나 세금크레딧도 더 많음) 그래서 결혼을 한 부부는 한배우자가 결혼이전에 세금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같이 보고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2012년 A 와 B 가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부부로 세금보고를 했는데 2014년 12월에 결혼무효결정을 법원에서 받았다. 그러면 두사람은 지난 결혼기간에 햇던 세금보고를 싱글의 자격으로 정정(amend) 하여 다시 보고해야하고 세금과 그동안의 이자도 물어야한다. (피해받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이런 비용도 상대방에게 청구할수 있겠지만 그런 민사소송과는 별개로 두사람에게 세금이 계속 따라 다니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한다. 결혼무효판정을 받은 사람중에 과연 몇 %가 지난 세금보고를 스스로 수정하여 다시 보고하겠는가 ?
미국은 결혼과 이혼 혹은 결혼무효에 대한 결정은 주법원에서 결정하고 그 기록은 개인의 기록으로만 남지 한국처럼 호적이나 가족관계증명서중 혼인관계증명서에 기록이 남길수 있는 전국화된 정보시스템이 없다. 더우기 범죄기록과 달리 결혼에 관련된 기록은 개인기록이라서 남이 함부로 볼수가 없다.
만일 2015 혹은 그 이후에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여 부부공동보고를 해도 국세청에서는 그 세무보고에 대해 감사를 하지 않는한 (중산층이 감사당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재혼한줄 알지 전결혼이 무효가 되어 지난간 세금정정보고의무가 있다는 것을 추정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마인드 (이런것이 한국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가 바뀌는 경우 의무적으로 그 이전 결혼의 상태에 대해 (이혼인지 무효인지) 물어보는 항목을 세금보고서에 만들든지 아니면 국세청직원이 개별적으로 납세자에게 서신을 보내 이혼서류사본을 보내라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하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는다. 인력이나 예산이 부족해서도 힘들지만 그런 식으로 법적인 개연성을 두고 그것을 추정된 범죄의도로 간주할 행정기관의 법적인 집행권리보다 개인의 사생활보호에 헌법이 더 우선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금보고의 기본정신이 이것이다. 아무리 상황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보고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간보고수치 즉....고용주가 피고용인에 지급한 임금내역이나 이자나 배당금수입을 특정인에게 지급했다는 금융기관의 수치와 개인의 세금보고내용이 일치할때는) 일단은 그 세금보고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준다. 결혼무효를 했으면서도 과거의 세금내역을 정정보고하지 않는사람이나 많이 벌어도 적게 보고하는 자영업자들은 이런 정부의 신뢰를 이용하여 개인이 세금을 착복하는 것이다.
한국도 기본적으로 비슷하고 미국에 있는 다른 민족들도 비슷하겠지만 한국이민자들중에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헀던 자영업자 (특히 델리가게같은 소비자로 부터 세일즈텍스를 직접 징수하는 업종)는 그 포탈한 세금이 그들이 모은 재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민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수 있음은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민이 장기체류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자와 다른 이유는 법적인 용어로 Legal resident 와 non-resident 의 차이에서 찾을수 있다. Legal resident 는 자신이 선택한 국가가 주는 법적인 혜택과 신뢰의 프리미엄을 받는 대신에 그 받은 것 만큼 사회에 반환해야하는 법적이고 도적적인 의무를 묵시적이며 명시적으로 동의하는 계약관계의 성립을 이민이라고 정의내릴수 있다.
만일에 포탈한 세금이 상당수가 되어 그것을 금융기관에 예치하거나 투자할수 없는 현찰로만 보관해야 한다면 그사람은 그돈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할수 없다. 우선 안전하게 둘 곳도 마땅찮아 자신이나 가족만 아는 비밀스런 곳에 보관해 두고 늘 신경을 써야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상황이 한인이민사회에 적지 않은 퍼센티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현찰은 따로 관리하면서 노인아파트나 웰페어를 타먹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철면피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애로사항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돈벌이하거나 사기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에 이제 막 분양을 앞둔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를 미주교포들에게 특별분양한다고 하며 계약금과 잔금은 한국의 친적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대신 납부하더라도 본인명의로 등기가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업자들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비밀리에 관리하던 현찰을 소위 버팅이라는 현찰교환을 통해 (한국서 원화받고 미국서 달러를 지불하는) 돈을 몰래 한국으로 보낸후에 자신의 명의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세를 놓던지 관리업체에 맡긴다. 이과정에서 사기를 당한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더 많은 경우가 사기를 당하지 않고 본인명의의 재산을 본국에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미국온지 30년 40년이 되고 돈을 벌고 자식교육을 잘 시켜서 주위의 부러움을 받는다고 해도 나의 정의대로라면 미국에 이민온 사람이 아니다. 이민온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본국으로 돌아갈려고 그동안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을 두개의 경제문화환경의 켄텍스트 (economic and cultural context) 에 놓고 마치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생명체의 선택적우위 (selective advantage) 를 이용해 개인의 욕망을 채운 것이다. 그 욕망이 차면서 비례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준 신뢰의 프리미엄을 교묘하게 배반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배반의 정도와 질이 나쁠수록 그는 다른사람들의 눈에는 성공한 이민자로 보여 질수도 있다.
미국이 한국보다 자국민에 대한 신뢰가 높다든지 그것을 보장하는 법제도가 잘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그런 신뢰가 계속적으로 부작용을 낳고 정직한 구성원들이 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사회의 구태의연함이 더 문제일수도 있다.
나의 글의 요점은 사람은 삶의 자리를 옮길때 개인이 원하는 행복의 총량에 도달할수 있는 선택적우위상황을 저울질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는지 아니면 오산이였는지도 중간 점검을 하면서 또다른 선택을 감행할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식을 존중하는 대부분의 시민사회는 다 나름대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사회의 일원이 되기는 꺼려하면서 자신의 계산과 예측만이 적중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영원한 여행자로 남을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미 150년전 베를린대학의 천재수학자 Bernhard Riemann 이 증명하였다. 시작과 끝이 규정된 1,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중심이 없어 어떤 표면내의 점이나 선을 한 곳으로귀결시킬수 있다면 (공같은 sphere) 플러스 1 과 마이너스 1은 같은 것이고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을 합한 것도 합하지 않은 두개의 독립변수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민상황으로 적용해 풀어보면 이민을 와도 이민을 오지 않아도 그리고 이민을 왔다고 다시 돌아가도 혹은 이민온 곳을 베이스로 두고 한국을 자주 방문해도 결국 만족은 변함이 없다. 세계는 같은 상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어도 봄은 오고 또 봄날은 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 찬란한 봄을 스스로 즐길수 있는 내공을 키워야....
JEFF
(4) Dead Man Walking
지금은 TV 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지만 직업의식인지 몰라도 평범한 스크린의 장면도 유난히 오래 기억남는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젊은 (아니 어리다고 표현해야) 아들이 수갑을 찬채로 경찰차의 뒷자석에 실려 떠나는 모습을 그 아들의 어머니가 힘없이 쳐다 보는 장면이다. (미국 TV 나 영화에선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관심없이 보았겠지만 이런 장면이 나올때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1) 떠나는 경찰차를 쳐다보는 어머니는 거의 울지 않는다. (2)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 나가든지 어머니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곧 그 어머니는 돌아서서 울음을 터트린다. (3) 그리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후 힘껏 빨아 당긴다. (4) 그 어머니는 날씬함과는 거리가 먼 비만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 "죽은자가 걸어가고 있다 (Dead Man Walking) "... 1995년에 소개된 이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인상에 오래 남는다. 사형을 당하는 젊은 남자와 그 남자를 마지막까지 설득하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중년의 수녀....
자신이 죽이고 성폭행한 남자와 여자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형수와 사회정의를 위해 빨리 사형시켜야 한다는 피해자의 부모들을 설득하는 수녀...그들은 사형수가 독극물주사를 이용해 사형당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본다. 그 시간 집에서 아들의 마지막을 상상하던 어머니는 오열하고 쓰러진다.
루이지애나 (Louisiana)... 미국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무척 더운 남부의 주이고 그래서 이런 저런 범죄들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 범죄를 막는 방법으로 형사사건에 대한 처벌이 엄청 강하고 웬만한 중범자에 대한 사형이 가장 많은 주이며 사형수에 대한 사면 역시 거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주이다.
"Oh mother ! Tell your children not to do what I have done.... spend your life in the sin and misery in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어머니 !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처럼 살지 않토록 가르치세요... 나처럼 외로운 소년원에서 후회와 비참함을 삼키며 인생을 보내지 않토록 하세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따라 불렀던 흘러간 팝송의 가사이다. 어머니는 옷 수선공이였고 아버지는 도박꾼이였던 자식은 감옥에 갇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고 있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게 변하고 있다. 돈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생긴것도 이쁘고 몸도 건강하며 성격도 좋아 그들의 부모를 즐겁게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자신의 자식들도 그렇게 키울것이다.
나는 가끔 신에게 기도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돈많은 부자가 예수께 찾아와 구원의 방법을 물었을때 가진 모든 것을 팔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답하신 것 처럼 나의 새로운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내자식의 부모라는 운명적이고 생물학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는 순간에서 시작될 것 같다.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내가 고생해 도달한 죄와 정의와 구원의 그럴듯한 정리는 자기만족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가방을 챙기며 허둥되는 나의 오래된 새벽녁의 악몽은 현실속에서도 자주 반복된다. JEFF
(5) The Universe Within by Neil Shubin
생체시계라는 용어가 있다. Biological watch 라고도 하고 Molecular watch 라고도 한다.
외부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더라도 우리의 몸에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맞게 신진대사를 움직이는 생체리듬이 있다는 이론인데 세포내의 DNA 의 단백질합성의 흐름과 패턴이 오랜시간 환경의 영향으로 이미 내재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기도 한다.
그 환경의 대표적인 것이 빛이다. 빛의 자극과 순환적인 패턴이 생체의 리듬을 만들고 생명체가 환경의 변화를 인지해 시간의 흐름을 추정하는 것이다.
... 하루는 24시간인데 왜 한 시간은 60분이고 1분은 60초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하지만 10진법을 쓰지 않고 60진법을 쓰고 있다. 60진법은 수천년전 바빌론문명에서 도입된 계산법인데 이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생존할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
60은 1,2,3,4,5,6, 모두로 나누어진다. 즉 첫짜리숫자 6을 구성하는 6개의 자연수단위 모두가 작은 구성성분으로 집합될수 있는 두자리 숫자가 60이다.
예로 30이라는 숫자와 70이라는 숫자를 60과 비교해 보자. 1,2,3 으로 30을 나눌수 있지만 60보다 작고 70은 60보다는 크지만 1,2,5,7 만으로 70을 나눌수 있다. 60은 첫자리의 구성요소가 두째자리 숫자와 같은 비례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최대의 숫자이다. 만약 그런 패턴을 이용해 환경의 변화를 아주 작은 단위로 세분화한다고 하여도 시작과 중간의 관계성이 변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망원경의 두개의 렌즈를 이용하여 빛을 반사시켜 외부의 대상에 촛점을 가장 가깝게 맞출수 있는 구조처럼 보인다.
60분 60초는 어떤 변화의 흐름이라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측정할수 있는 방향성 (pattern of directive change) 을 가진 구조적인 사고에서 탄생한 듯하다. 이것은 나자신의 생각이다. 우리에게 하루 24시간 1440분이 주어지는 이유는 지구가 자전하는 이유이고 태양의 빛이 우리에게 오는 변화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패턴화시킨 결과이다.
생물학자 Neil Shubin 은 그의 책 "The Universe Within" 에서 모든 생명체와 지구를 구성하는 암석층은 물리적이든 화학적이든 우주공간의 변화를 어떤식으로 패턴화하여 내재하는 존재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 인간속에 있는 우주의 역사를 찾아내는 그의 예지가 대단해 보인다. JEFF
(6)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많은데 그 다름을 가능케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인간은 두뇌가 발달하여 도구를 발명하고 그로 인해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기억력이 좋아 과거의 일이 재현될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동물보다 뛰어나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계획하고 그리고 그 계획을 수정하는 지적인 능력이 있다. 즉 과거와 현실 그리고 가상현실과 진행중인 현상을 비교분석하는 구별된 능력이 있다.
이런 의식의 영역을 관장하고 수준있는 사고를 가능케하는 신경의 생화적인 네트워크에 무엇이 더해졌을까 ?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찾아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어 양성자와 전자 중성자의 역학관계를 상상하듯 인간의 의식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면 마지막으로 남는 아주 희미한 원초적인 욕구는 무엇일까 ?
나는 이문제를 꽤 오랜 시간 생각을 해 보았다. 정답이 있을수 없는 문제이기에 시간날때마다 조금씩 정리해 보았는데 역시 어려운 문제이다. 이문제를 푸는 한가지 그럴듯한 방법은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뼈대를 하나씩 하나씩 역으로 부셔가는 것이다.
(1) 시간의 한 방향성을 부정하고 시간의 역행성을 인정하면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는 의식의 편이를 위해 만든 사고의 차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 시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할수 없는 것이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기에 공간의 필연성에 대한 의심도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이두가지가 없으면 인간의 의식은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수 없기에 사고의 실용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중간결론은 시간과 공간이 특정한 방식으로 두뇌의 신경회로에 집중되는 부분과 그것이 해체되는 부분의 연결고리에 존재하는 어떤 에너지의 타입을 찾는 것이 문제해결에 대한 실마리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일단 오랜 기억 (Long term memory)을 예로 들자. 평소의 경험이 패턴화된 양식으로 발전하여 뇌의 한부분에 시공간의 특수한 조합으로 저장된다. 인간은 그런 기억을 가끔씩 의식의 영역으로 다시 전환시켜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규정하고 제어하는데 활용한다.
그런데 어느날 그 기억의 패턴이 급작스럽게 변할때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 기억을 구성했던 시간의 방향성을 부정하고 공간의 제한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구성했던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고 마치 정교한 실험도구를 거쳐 검출된 여과물처럼 원초적인 욕구가 나온다. 나는 그것이 바로 "기다림" 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에서 출발하였지만 동물과 구별되는 의식을 가능케했던 모든 의도적인 사고의 기반에는 기다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환경의 공포를 이겨내고 정신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인류학자들이 설명하지만 인간에게 종교보다 더 원초적인 것이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종교자체가 될수 없지만 종교는 기다림의 한 형태이다. 기다림의 명분과 자세가 논리적이고 감동적일수록 그 종교는 생명력이 강하다.
인간은 특정한 대상이나 불특정한 가능성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기억의 재구성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허구성을 맛보는 과정을 동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허구성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과거의 현상은 추상적인 의미로 다시 탄생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다림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고 기다림이란 것이 비효율성이나 무능력의 동의어처럼 인식되는 현실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서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욕구들은 상당히 동물적일수 밖에 없다.
강의중에 쓰러져 더이상 자기에게 찾아오지 않는 주인을 한없이 기다리는 한 생명체 (영화 하치이야기중에서) ... 우리는 그 동물의 머리속을 분석할수는 없지만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주인에 대한 기억은 인과관계가 맞지않는 상태로 부셔져 가고 이동물도 원초적인 욕구에 다가 가게 된다.
오지않는 주인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같은 개가 되든지 아니면 오지않는 것이 자신을 버린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한없는 기다림을 택하는 개의 모습을 한 인간이 되든지...
외로움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나는 오지않는 누군가를 그리고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이 깊어질수록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기다림은 나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다. JEFF
(7) 프린스톤대학이 일등인 이유
미국온 이후로 시간날때마다 명문대학을 방문해서 그학교를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취미가 되었다. 모든 명문대학은 나름대로 학문적인 권위와 자존심이 있는데 역사가 깃든 건물뿐 아니라 캠퍼스 곳곳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보아도 알수 있다.
1987년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대학을 처음 방문했었다. 고색창연한 아이비리그의 자태를 제대로 풍기는 캠퍼스를 둘러보고 어떤 조각상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백인이 손에 칼을 들고 두손이 묶여 있는 젊은 남자를 죽일려고 하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노예를 수입해와 힘든 일을 시킬때 그들의 인권을 유린했던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16-7 세기 유럽의 강국들이 세계로 뻗어 나갈때 그들의 오만함이 정복한 땅의 원주민에게 투영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거라는 정도였다.
"과거의 역사를 잊지말고 정의편에 서는 지성인이 되자" 정도로...
그런데 며칠전에 갑자기 그 조각상이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이 확인되었다.
놀랍게도 칼을 든 사람은 아버지이고 무릎을 끓고 애원하는 젊은 남자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브라함이고 아들의 이름은 이삭이다. (조각가 George Segel 작품)
구약성경에 나오는대로 야웨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버지는 칼을 들었다. 구약시대의 상황과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요즘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일수도 있다. 왜 이런 작품이 명문대 캠퍼스의 한 가운데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조각품이 있는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이학교의 주요 건물 두개가 나온다. 왼쪽으로 꺽어지면 중앙도서관 (Firestone Library) 이 있고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아름다운 채플(University Chapel)이 나온다. 일단 이 조각품을 오래전에 캠퍼스에 전시한 학교당국의 의도는 짐작할수 있다. 프린스턴대학은 철저한 기독교정신(장로교)에 입각하여 세운 학교이다. 그래서 교육이념으로 지성의 훈련은 절대자에게 복종하고 그 뜻을 세상속에 펴가는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한다고 정하였다.
이학교는 돈되는 3개 대학원이 없다. 법대, 의대, 경영대학원... 만약 이 3개의 전문대학원을 키웠다면 세계최대의 도시인 뉴욕을 끼고 있는 지리적인 잇점을 이용해 그동안 전문대학원 출신들의 성공한 동문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업(?)을 하지 않아도 이대학은 US News and World Report 의 대학랭킹에서 항상 하바드와 함께 공동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관심있는 수학과 물리학분야만 놓고 본다면 지난 반세기동안 이대학의 동문들이나 교수진은 굉장하다. 수학계의 최대 난제였던 350년된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Andrew Wiles 도 영화 Beautiful Minds 의 실제 주인공이였던 John Nash 도 이대학 교수였고 아인쉬타인도 이대학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였고 미국의 대표적인 물리학자였던 Richard Feynman도 칼텍에서 교수생활을 했지만 프린스턴대학서 박사를 하였다. 70년대 80년대 한국의 인기스포츠였던 고교야구와 비교하면 선린상고, 광주일고, 부산고를 합쳐서 한팀을 만든 정도로 얘기할수 있다.
작년봄에 한국을 뒤집어 놓았던 세월호사건이 터졌을때 인터넷에 오른 사진을 보고 나는 내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 사진은 세월호의 사주가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언론의 조명속에 울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 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였다. 나는 글로서 분명히 밝혔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만일에 내아들이 저 뱃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는 종교인들을 저주하고 사주를 지옥까지 쫒아가서 죽여 버리겠다"고...
자신의 핏줄앞에서 확연히 들어나는 것이 내자신의 모순이고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고 인간지성의 한계이다. 학문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런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낀다. 자신이 만든 편견과 자신이 선호하는 관점과 우리의 이해관계를 정당화시켜 주는 논리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합리화를 과감히 극복하지 못한다면 진리의 세계는 요원하고 끝없는 갈등과 분쟁만 계속된다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동상이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인간은 영원히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을 잘 알기에 자신의 분신인 자식의 애원에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기도하기 위해 어느날 아침에는 채플로 가고 그래도 나약하지만 객관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또 다른 아침에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우리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였다. 신의 뜻에 따라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든 아버지의 검은 동상을 보면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었다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본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구성(plot)도 위대하고 스토리(story)도 감동적이다.
물이 세상과 생물을 화학적으로 만들었다면 그 물보다 진한 피의 역사가 인류를 진화시켰다. 그진화의 원동력은 고난이다. 그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류의 역사에 감히 발전이라는 상상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자식의 애처로운 눈길을 포기하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할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나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모든 부모들에게 감히 고한다. 자식은 바로 우리들의 거울이고 인간적인 한계이다. 자식의 모습에서 꽃만 보이고 잡초를 발견하지 못하면 인류역사의 진보란 없다. 그리고 우리보다 못한 이웃의 자식들의 얼굴에서 그들을 향한 신의 섭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신이 만든 편견과 그 편견이 만들어 내는 사고의 우상속에서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진리의 가치는 그런 노예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곳에 있다.
(8) Made in Korea 명품 서울여상
서울여상에 대한 글은 몇년전에 다른 곳에서 쓴 적이 있지만 제가 서울여상출신이 아니기에 동시에 서울여상출신이 쓴 모교에 대한 글이 아니기에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소개하여 객관적인 이해에 충실할려고 노력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아래에 소개할 책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의 관점 (조금 특이하지만)에 기준하여 왜 서울여상이란 학교가 한국적인 명품학교인지 그 논지를 정리하여 요약했읍니다.
1. 어느 학부모가 진솔하게 표현한 긍정적인 이해
" (인용시작) ...전용면적12평에서 20평으로. 노후 빌라에서 나홀로 아파트로, 주차장을 갖추었고, 단지 주거환경을 개선했는데, 공사대금을 내느라 1억3천만원에 대한 대출원리금을 월100만원 이상 15년 갚아야 하는 하우스푸어가 되었습니다. 행정7급 공무원인 남편 월급으로 세자녀 사교육은 피아노교육 빼고는 시켜보지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으므로 큰아이에게 특성화고교인 서울여상을 소개했습니다.
아이는 설명회를 다녀오더니 '결정했다'며 준비했습니다. 딸아이가 사교육 안받고 중학교 내신17%는 저에게 고마운성적이었습니다. 다른아이의 1%보다 제 아이가 땀흘려 노력한 17%가 저에게는 힘이 됩니다.올해 서울여상 내신평균이 13.2%라고 하는데 커트라인이 20%라고 합니다. 제 아이는 3월2일 입학후 8일부터 학교에서 석식을 하고 방과후학교를 신청해서 공부하고, 자율학습을 하고 밤9시~10시경 귀가합니다. 저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1시간30분가량 걸리는 통학거리를 불편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람맞춰 일어나고 저는 아이에게 격려가 되기 위해 아이보다 30분 먼저 5시30분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준비합니다.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저와 딸은 불평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제가 칭찬하는 내용은 서울여상은 사교육없이 방과후학교와 교내수업만으로 각종 자격증을 따고 내신으로 취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잠실에서 딸아이 친구들은 학원을 1-2군데 이상다니는데, 내 아이는 그런 혜택없이 시험에서 경쟁하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경쟁력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원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딸이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볼때 저는 서울여상에 대해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갖습니다.
서울여상에서는 750명 학생들이 충분히 자율학습을 하도록 교실도 개방해 주시고, 적절한 시기에 방과후과목을 개설해 주셔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합니다. 아이는 낯선 과목을 배우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노력하려는 자세를 볼때 서울여상의 교육방침. 교장선생님. 교무부장님. 담임선생님. .... 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학생들 교복에서도 단정한 생활지도... 가정경제가 조금 어렵지만, 자녀가 힘내서 공부하니 공교육기관인 학교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서울여상이 더욱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울여상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취업후 진학을 목적으로 입학했고, 제 아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학교측의 따뜻한 인성교육으로 아이들이 주눅들지 않고, 낯선 학부모에게도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은 타 학교에서는 볼수 없었던 모습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성적지상주의 , s.k.y대학내지 in서울대학진학을 위해 어른 아이 구별못하는 현 세태에서 비록 할아버지와 부모의경제력이 약해서 진학했지만, 아이가 행복하게 학교생활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등교하고, 밤 늦게까지 학업에 집중하는 서울여상 학생들 모두 건승하기를 바랍니다. (인용끝)"
2. 댓글에 달린 다양한 시각들
(1)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취지가 왜곡된 한국 교육의 실체를 생각해볼때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되지만 교육 그자체의 목적이 직업훈련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저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읍니다.
(2) 서울여상을 지나갈 때 거기에 달린 현수막은 죄다 자겨증 딴 내용만 있어요. 고등학교가 단지 취업만이 목적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만 하는 것이나 취직하기 위해 공부만 하는 것이나 다를게 없어요.
(3) 저희때 부턴가 인문계는 개나 소나 다가고 상업계열 공업계열의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친그들이 많이 갔습니다. 현재 지나고 보니 중학동창중에서 SKY 에 간 친구들보다 상고 공고로 진학한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 잘사는 경우도 많아요. 이런 얘기 아무리 해도 대한민국 대학수는 반으로 절대 줄일수는 없어요, 대학교수들 밥그릇 문제로....
3. 댓글에 대한 저의 답글
우리는 서울여상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과 판단을 대신할수 없읍니다. 서울여상이 있다면 덕수상고나 부산상고가 있읍니다. 그쪽 출신 친구들도 꽤 됩니다. 고등학교때 주산암산 자격증따서 취업은 쉽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인생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항상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 대학진학 대학원진학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여상진학해서 바로 취직한다고 해서 인생을 그런 관점에서만 중요시하는 것도 아닐것 같고 아마 그들도 여유만 되었다면 대학진학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교육의 주체는 인간자신입니다. 교육의 환경과 내용이 이상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목적이 이기적이면 대학교육도 문제가 많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나 미국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제의 중심에는 좋은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있읍니다.
왜 아직도 한국사회는 직업기술과 연관되는 분야의 교육은 다른 인문사회과학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지 알수 없습니다. 직업기술에 대한 교육을 어릴적부터 받았다고 제대로 된 인성교육이나 자신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볼수 있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선비와 그들의 계급의식을 우대시하던 구시대의 사고에 기인한 오래된 편견입니다.
4. 책소개와 저의 생각 정리
이책에서 저자는 [1. 현장의 요구를 파악하고] [2. 기초에 충실한 교육을 하고] [3. 건강한 문화를 통한 건강한 인재를 지향하고] [4. 균형감각을 갖춘 인재를 기르고] [5. 실질적인 경쟁력] 을 갖춘 것이 서울 여상이라고 소개합니다.
상당히 학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홍보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나름대로 직업학교라는 과거의 관점을 탈피하려고 한 저자의 노력을 확인할수 있었읍니다.
인간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를 평가를 할때 가끔씩 저는 생물학적인 진화론의 관점을 씁니다. 그때 사용하는 두가지 관점은 (1) 환경의 도전에 대한 개별생명체의 적응능력 (adaptability) 과 (2) 자신의 시스템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가치추구를 유발하고 규범화하는 내재적인 능력 (sustainability) 입니다.
이두가지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같이 적용되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생존능력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보강 (feedback and re-enforce) 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치를 창조하여 내재적인 규범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직과 국가는 문화사회적이고 정치경제적인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존방식은 한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브랜드가치로 존재할수 있읍니다.
서울여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 두가지 관점을 경쟁구도에 기초한 동물적인 본능으로 보는 피상적인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과 취업교육이 돈을 버는데 집중하여 그들의 경제적인 생존능력만 조금 높인다고 보는 견해이지요.
저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교육이든지 아니면 일반학교에서 수업하는 학문의 내용이든지 교육의 현실적인 목적과 방법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스스로 배양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런 교육의 출발은 세상과 자기자신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경제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경쟁력을 키우면서 그것을 인생의 발전을 위한 교육적인 소양으로 삼는다면 서울여상이 대표적인 직업학교라고 하여도 수준있는 교육기관임에 틀림없습니다. 너무나 한국적이고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생존의 방식을 터득하는 인생교육의 현장입니다. 세계최고의 교육환경을 자랑하는 미국에 살면서도 가끔은 그런 통제되고 목적이 분명한 현실교육의 현장이 그리워 질때도 있읍니다.